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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녕, 헤이즐,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우리의 선택카테고리 없음 2016. 6. 16. 14:51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안녕, 헤이즐
12세 관람가, 2014년 작품
드라마
감독 : 조쉬 분
출연 : 쉐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
즐거움 4
슬픔 4
잔인함 1
야함 2
박진감 1
화려함 1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암 환자들의 색다른 모습.
주인공인 헤이즐, 그의 연인 어거스터스는 둘 다 젊은 나이에 발생하는 암으로 투병중인 환자들이다. 헤이즐은 폐로 전이된 갑상선암으로 인해 정상인의 폐기능에 비해 절반정도 밖에 되지 않아 평생 산소공급기를 달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암의 종류는 다르지만 어거스터스의 경우에도 다리에 발생한 골육종이 전신으로 전이 되어 예상 생존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갑상선암은 여자 연예인들의 투병기가 여럿 있을 정도로 굉장히 많아진 암이다. 2004년 이후로 대한민국 암 순위에서 1위일 정도로 초기 발견과 치료가 조기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지만, 영화에서 처럼 젊은 나이 (20~40대)에 발생하는 유두암(papillary thyroid cancer) 의 경우에는 여성에서 3~6배 정도 발병률이 더 높고 주변 경부 림프절과 폐로 전이되는 경우가 있어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에는 예후가 안 좋을 수 있다.
*소아암에서 가장 흔한 것은 혈액종양인 백혈병이고 다음으로는 뇌를 포함한 신경계에 생기는 종양이다. 그 뒤를 바로 골종양이 따르고 있는데 그 중 골육종은 10-20 대 남성에서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종양이다. 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혈행성 전이가 주로 발생하여 전신적 전이가 쉽다. 수술적인 완치를 위해 광범위 절제술 및 림프절 제거술을 시행하더라도 뼈의 결함이 생기기 때문에 수술후 후유증도 심하게 남는다.
한국적인 정서의 신파극이라면 지나치게 많은 슬픈 장면과 눈물을 쥐어짜게 하는 장면으로 표현되었을 스토리를 조쉬 분 감독은 어찌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죽음을 앞둔 이 둘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자신과 같은 처치의 사람이, 바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종양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고 제한된 생활을 하던 헤이즐은 그로 인한 우울증을 갖고 살았다. 부모의 권유로 암 환자 모임에 나가기 전까지 특별한 꿈도, 즐거움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헤이즐은 모임에 나가 어거스터스를 만나 완전히 다른 모습의 삶을 살게 된다.
환자들의 모임으로 가장 유명한것은 AA (Alcoholics Anonymous), 즉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임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많이 나온 이 모임에서는 서로의 경험과 의지를 이야기하며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금주에 대한 실천과 삶에 대한 용기를 얻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에서 나오코가 입원하여 치료를 받은 요양원의 경우도 이처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며 치유해주는 기능을 한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환자가 치료에 대한 의지와 순응도(compliance) 가 떨어진다면 의사의 치료는 제한적인 기능을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환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신체적인 아픔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혼적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는 것이 이런 모임의 순기능이다.
헤이즐은 자신과 같이 암 투병 중인 어거스터스와 지내면서 점점 삶에 대한 아름다움과 의지를 가지게 된다. 또한 좋아하던 소설의 작가와 만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여행을 가면서 정신적으로 더욱 단단해져 간다.
암은 본인만 힘들게 하는 것일까?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암투병중인 환자들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의 부모들이다.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으로 영화를 봤을 때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도 슬펐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들의 부모로서 아픈 자녀들을 대하는 부모들의 절제된 슬픔에 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부모들의 슬픔은 과장되게 표현되지 않는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오열이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의 클로즈업도 없다. 그들은 아픈 자녀를 옆에서 지켜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안아줄 뿐이다. 몸이 불편한, 아픔을 느끼는 자녀를 바라보는 마음은 육아를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자녀의 고통이라는 것을. 하지만 감독은 그러한 슬픔에 그 이상의 강조를 하지 않아 더욱 조용하게 가슴으로 그 감정을 느끼게 하였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여 만나게 된 소설의 작가. 따뜻한 환대를 기대했던 그 둘에게 그는 독설을 내뱉는다.
"동정을 바라는 암 환자, 주변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본인만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영화 후반부를 보면 그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되지만 이 장면에서는 그런 독설을 뿜어내는 그가 얄미울 뿐이었다. 그도 결국에 암투병 자녀를 둔 아버지인것을...
죽음을 꼭 슬픔으로 맞이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어둡지도,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인생의 한 부분처럼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는 주인공들이지만 그렇다고 현재를 낙담하며 우울하게 보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적인고 낙천적이게 다가올 앞날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며 지낸다. 담배도 피고, 섹스도 하고, 전 여자친구에게 복수도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걱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우울해 하지 않는다.
헤이즐의 연인인 어거스터스의 장례식도 그저 그냥 스쳐가는 일처럼 장엄하거나 슬프게 표현되지 않는다. 만약 친구들의 추도사가 장례식에서 읽혀 졌다면 이 영화가 죽음에 대해 가지는 입장이 애매해 질뻔 했는데... 다행히도 어거스터스가 죽기전 셋이 모여 추도사를 명랑하게 읽는 그 모습과 장면이 죽음과 더욱 상반되어 죽음에 대한 의미가 더욱 강하게 전달되었다.
보내는 이들, 남은 이들의 자세
후반부에 나오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거스의 전화를 받고 나가는 헤이즐과 부모님이 대화하는 잠깐 동안의 장면인데, 명대사가 나와 마음을 울린다. 자신이 죽고 나면 엄마가 힘들어하며 살 것이 걱정되어 심하게 말을 하는 헤이즐. 헤이즐의 부모님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듣고도 현명하게 대처 하며 딸에게 사랑과 믿을을 확인시켜준다.
"엄마는... 우리의 경험으로 다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해."
"나는 항상 너의 엄마일 것이고, 그것은 최고의 역할이야."
"고통이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Always be your mother"
이어지는 거스의 장례식. 거스가 죽는 장면은 나오지 않고 대사로 처리된다. 거스의 부모말고는 우는 사람도 없이 조용히 장례식은 마무리 된다. 장례식은 죽은 이를 위하기 보다는 남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며 헤이즐은 얘기한다. 본인도 많이 슬프지만 슬픔을 슬픔으로 끝내기 보다는 새로운 의지를 가지며 영화는 마무리 된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영원이라는 시간을 선물해준 거스를 기억하며....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
오늘을 사는 모습이 바뀌지 않을까?
내일이 오늘 같지 않다면,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면,
오늘을 같이 보내는 사랑하는 이가 내일은 없을 수도 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처음 놀러온 놀이동산처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을까?
같은 하루 하루가 지루한 이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영화이다.